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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입선] 너와 함께 한 모든 순간이 눈부셨다(권O영)

관리자 2023.04.26 15:04 조회 73
결혼 10년 만에 아이가 찾아왔다. 그 아이가 올해로 딱 10살이다. 아이 없이 살자고 약속했는데, 네가 먼저 약속을 깼다며 임신 초기 남편이 잠시 나에게 등을 돌렸다. 아이를 원해서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찾아온 아이를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임신 사실을 알자마자 시어머니께 먼저 알렸다. 부부 둘이 상의하다 그냥 떠나보내자 결론 낼까 봐 무서웠다. 본능이랄까 직감이랄까 시어머니라면 우리 아이를 지켜줄 것 같았다. 주변에서 아이를 가질까 말까, 낳을까 말까 고민하는 부부들에게 이 비기(祕機)를 알려준다. 먼저 인생을 살아본 어른이라면, 당연히 자녀를 가져보라고 조언할 테니까. 아이로인해 힘든 만큼 그동안 못 느껴본 행복도 무수히 많이 느낄 테니까.

모태솔로 둘이 소개팅으로 만나 뜨겁게 연애했다. 처음 해 본 연애가 재밌었고, 서로에게 주는 안정감이 좋아 얼마 지나지 않은 25살에 결혼했다. 둘만으로도 깨가 쏟아져 아이 없이 재밌게 살자고 약속했다. 퇴근하고 맛집을 찾아다니고 휴가를 맞춰 여행을 다녔다. 이대로 둘이 50년 해로하면 성공한 인생이지 안심했다.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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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우리 둘이 재미있게 살자고 한 딩크부부에게 아이가 찾아왔다. ⓒ권O영

그런 우리 인생에 지각변동을 예고하듯 찾아온 아이라 6개월이 다 되도록 태명도 지어주지 않았다. 아이의 고모가 “언니, 오빠 큰일 났네. 아이가 태어나면 삐약삐약 얼마나 시끄러울까?”하며 축하인지 위로인지 모를 소리를 해 주던 날, 함께 태명을 ‘삐약이’라고 지어 주었다. 고모의 예언처럼 울음소리와 움직임이 많은 시끄럽고 호기심 많은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와 함께 한 10년은 고되고 스펙터클 했지만 45살 내 인생을 영화로 만든다면 가장 화사한 톤을 입히리라. 지금부터 그 빛나는 10년을 다섯 장면으로 압축해 보려고 한다.

#S1. 산후조리원에서
삐약이를 신생아실에 데려다주고 돌아와 내 침대에서 깜빡 졸았다. 5년 전 돌아가신 친정 엄마를 꿈에서 만났다. 엉엉 울며 엄마에게 소리쳤다. “엄마라면 무조건 자식을 안아줘야 했던 거잖아.” 내가 기억 못하는 신생아 시절 무수한 밤, 엄마가 나를 안아 살리고 살찌웠다는 것을 출산과 양육의 경험을 통해 온전히 알아버렸다. ‘엄마가 나를 안고 졸다 떨어뜨렸다면 나는 죽을 수도 있었구나, 엄마의 혼신이 나를 살렸구나!’ 사는 게 힘들어 나를 물고 빨고 따뜻하게 안아주지 못했던 엄마를 용서하게 됐다.

엄마 삶의 무게까지 실어 나를 질책하고 가끔은 폭언도 했던 엄마를 있는 그대로 미워할 수도 있게됐다. 네 자녀를 키워 성인으로 직업을 갖는 것을 보자마자 돌아가신 친정 엄마에게 미안하고 힘든 엄마의 삶에 대한 죄책감이 커서 나를 힘들게 한 엄마를 쉽게 원망할 수도 없었는데 삐약이 덕분에 그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엄마를 마음껏 그리워하고 또 마음껏 미워할 수 있게 됐다. 출산 후 꿈을 통해 엄마와 화해한 덕분이다. 출산과 양육 열흘 만에 35년 간의 모녀 관계를 통째로 이해해 버렸다.

#S2. 수시로 재생해 보는 동영상, 자기 이름을 발음하던 아이

뒤집기, 배밀기, 앉기, 서기, 걷기, ‘엄마’ 호명하기...... 아이의 크고 작은 과업들은 온 가족의 기다림이고 기쁨이었다. 모조리 동영상에 담아두는 건데....... 그 기쁨의 순간들이 시간이 흐르면 기억에서 사라져 아쉽고 많이 그립다. 그래도 몇 개의 아주 예쁜 순간은 또 남아 있어 우리 부부가 수시로 재생해 보는 동영상이 있다. 아들이 자기 이름을 또박또박 발음하던 순간이다.

지원이는 자존심이 센 아이라 ‘아빠’도 분명하게 발음할 수 있을 때까지 입 밖에 내지 않는 아이였다. 그렇게 어렵게 아빠를 발음하고 한두 달쯤 흘렀나 두 돌을 앞둔 어느 날 아침, 혼자 잠에서 깨어 거실로 나와 앉더니 하품을 크게 하고는 자기 이름을 혼자 발음하며 놀고 있었다. ‘지’와 ‘원’을 또박하게 발음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얼마나 예쁘던지, 재빠르게 동영상으로 찍어 남겨 두었다. 보고 또 봐도 감격스럽고 기특하고 행복하다.

#S3. 어린이집에서 맞은 첫 크리스마스
만 2세가 된 지원이는 어린이집 생활을 시작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어린이집 선생님들과 친구들과 보냈다. 생애 첫 사회생활을 마친 그해 겨울, 가족들은 어린이집에 초대 받았다. 그 어린 것들이 발음도 불분명한 노래를 부르며 크리스마스 율동을 보여 주었다. 동작을 배우고 익혀 친구들과 함께 율동을 완성한 아이를 보고 있다가 그만 줄줄 울고 말았다. 부모가 없는 순간에도 자라는 아이들. ‘온 마을이 함께 키우는’ 순간을 목격한 기쁨과 안도감에서였다. 기관과 부모가 서로 믿고 의지하며 아이를 함께 키우는 것이구나, 그리고 아이는 온 힘을 다해 사회화되고 있구나, 온 세상이 고마운 순간을 아이를 통해 자주 경험한다.

#S4. 초1 줌 학예회
2022년 3월, 코로나 팬데믹 2년째. 초1 아이들이 모인 교실도 보고 싶고, 담임 선생님께 인사도 드리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 고맙게도 아이의 초등학교에서 늦가을에 학급 줌 학예회를 운영했다. 이날 아이는 청바지에 핑크색 학년 티셔츠를 입고 등교를 했다. 옷을 맞춰 입고, 1학년 내내 친구들과 함께 배운 실로폰으로 ‘도레미송’을 함께 연주했다. 아름다운 합주였다. 부모님들을 놀라게해 드리겠다고 이 프로그램을 깜쪽같이 숨겨가며 연습한 아이들과 선생님 덕분에, 깜짝 선물을 받았다. 아이들이 각자 나와 동요를 부르거나 만든 작품을 소개하는 시간도 있었다. 지원이는 가을에 다녀온 제주도 가족 여행을 동시로 써서 낭독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마스크를 쓰고’로 시작하는 동시는 여행의 짜릿했던 순간을 담았고, 여행이 끝나는 아쉬움을 ‘감귤 초콜릿’의 ‘씁쓸함’에 빗댔다. 초등학교 6년 동안 아이의 정서도 사회성도 표현력도 무럭무럭 자라겠구나, 학교와 가정에서 좋은 경험을 많이 시켜줘야겠구나, 책임감을 느꼈던 행복한 순간이다.

#S5. 엄마가 없는 동안 자라는 자립심
워킹맘인 나는 올해 3월 복직했다. 7시 출근이라 아이는 엄마 없이 아침 시간을 보내다 등교를 한다. 올해부터 초등학교 아침 돌봄이 확대돼 같이 데리고 나와 학교에 보낼 수도 있지만 어린 아이가 아침부터 긴장하고 서두르는 게 마음이 쓰여 신청하지 않았다. 아이는 차려 놓은 밥은 잘 먹고 가는 기특함을 보여주었지만 이를 안 닦고 가거나 학교에 늦게 도착하기도 하면서 이런저런 실수를 하는 중이다.

“엄마, 내일부터는 8시 30분부터 준비할까 봐. 혼자 준비하니까 시간이 더 걸려.” 

늦어서 선생님께 혼났다는 하소연을 하면서 자기가 미리 생각해 놓은 해결책까지 덧붙였다. 책가방을 두고 가는 날도, 체육복을 안 입고 가는 날도 있겠지만 이러면서 자기 인생을 스스로 챙기는 자립심 강한 청소년으로 자라나겠지 싶어 걱정보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괜스레 마음이 부풀어 부모로부터 독립해 자기
공간에서 혼자 살아갈 장면까지 꿈꾸며 마음이 뿌듯해졌다.

생명의 탄생과 성장을 지켜보는 일은 인간에게 충만감을 준다. 딩크족으로서 ‘나’, ‘나와 너’만 생각하며 살던 시절과는 차원이 다른 행복이다. 이번 주는 뭐하고 놀까 궁리하고 퇴근 후에 누구를 만날까 고민하던 삶보다 아이 뒤치다꺼리를 하는 지금의 삶이 훨씬 만족스럽다. 아이를 수발하고 사랑하는 일, 다음 세대가 살아갈 세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이런 일들이 매일의 일상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지겹고 힘들지만 우리 부모가 그랬듯, 나도 다음 세대를 위해 기꺼이 이만큼은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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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아, 엄마 아빠에게 와줘서 정말 고마워. ⓒ권O영

사실 이 글은 10년 뒤 스무 살이 될 아들에게 써 두는 편지다.

“지원아, 엄마 아빠에게 와 주어서 고마워.” 네가 태어나는 순간 너에게 우리가 들려줬던 말이야.

그날부터 매 순간이 그랬단다. 때로는 서로를 탓하고 미워도 했지만 서로 보듬고 지지하고 응원하는 순간이 더 많았지? 그 희노애락 모두가 우리 가족의 행복한 순간이었단다. 네 덕분에 우리가 맛보게 된 행복이야. 너는 지금 온 가족의 뽀뽀 세례를 받고 자라 우리의 뽀뽀를 피해 다니기 바쁜 10살이란다. 그렇지
만 지원아, 너도 자신보다 더 사랑하고 싶은 누군가를 만나면 지금의 우리처럼 뽀뽀해도 되는 순간을 노려가며 뽀뽀 세례를 퍼붓고 있을 거란다. 그건 우리 가족 내력이니까 너도 분명히 그럴 거야. 너도 우리처럼 아이를 낳아 길러보고 싶다고 했지? 너도 우리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아이도 키우며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이 눈부신 삶을 살아보길 바란다.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사랑한다. 쪽쪽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