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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입선] 나를 키워주고 있는 내 아이들(이O영)

관리자 2023.04.26 15:12 조회 239
28살이 시작되고 얼마 후, 현 사회에서는 다소 어린 나이로 결혼이라는 관문에 들어가게 되었다. 다른 이들처럼 신혼을 즐기고자 하는 마음에 “아이는 나중에”라는 생각을 가지고 결혼 생활을 시작하였다. 하고싶은 것도 많았고 욕심도 많았던 20대의 나는 엄한 부모님 밑에서 자라며 여러 가지 많이 억눌려 있었다.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놀다 보면 9시. 어김없이 부모님의 전화가 온다. 

세상이 무서운 것은 알지만 부모님의 걱정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래서 결혼을 남들보다 일찍한 걸지도 모르겠다. 결혼을 하고 가장 좋았던 것이 밤 12시에 밖에 있어도 부모님 전화가 오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남편과 밤거리를 누비는 것도 좋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았다. 물론 이 사람과의 생활을 맞춰나가는 부분에서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4개월이 지나고 예정보다 일찍 아이가 찾아왔다. 기뻐할 생각도 없이 여러 가지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아이가 평생 쓰는 돈이 3억이라던데.. 노후자금은 어떻게 하지..’

자본주의사회에 살면서 돈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는 가정은 없을 것이다. 나 역시도 평범한 남편과 평범한 내가 만나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컸다. 마냥 아프다는 정보밖에 없고 내가 경험한 바가 아니기 때문에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이런 여러 가지 걱정을 뒤로 한 채 뱃속의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커갔다. 심장소리를 듣고, 초음파로 아이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태동을 느끼고. 아이를 임신한 임신부는 생명의 신비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가 태어나던 그 순간을 1000만화소의 카메라로 찍은 것처럼 내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기억한다.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아이를 보는 순간 크나큰 고통은 저 너머로 사라졌다.

작은 아이가 나와 눈을 마주치고 빤히 바라보았다. 슬픈 영화를 봐도 절대 울지 않던 나는 그날 행복의 눈물이라는 것을 처음 흘렸다. 배경음악으로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흘러 나오고 있었고 이 노래의 가사가 나의 마음속에 콕콕 박혀 흘러 들어 왔다. 아이의 체중과 키를 재기 위해 간호사선생님이 아이를 데리고 나갔고, 갑자기 고통이 느껴졌다. 이 또한 내가 살면서 겪지 못했던 신비로운 순간 이었다.

병원에 있는 2박 3일 동안 아이는 신생아실에, 나는 병실에 있었는데 젖을 먹으러 올라오는 두 번 외에도 아이가 정말 보고 싶었다. 누구를 닮은지 모르겠는 쭈글쭈글한 형체가 내게 이런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할 줄은 몰랐다.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아 걷기도 힘들었지만 아이를 안고 모유수유를 할 때 세상 누구보다 강한 엄마가 되어 있었다. “어머님”이라 부르는 간호사 선생님의 호칭이 너무도 어색했지만 나는 그렇게 엄마가 되었다.

아이가 태어난지 5일쯤 되었을까. 조리원에서 아이와 머물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엄청난 울음소리에 조리원 전체가 쩌렁쩌렁 울렸다. 방금 모유수유를 끝내고 왔기에 나는 여유롭게 운동기구에 누워 있었다.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고 계속 들리고 다급히 아기를 봐주는 선생님이 오셨다.

“아윤이 어머니, 여기 계세요?”

놀란 나는 얼른 운동기구에서 내려와 선생님을 따라 갔다. 한참 악 을 쓰며 울었던 아기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저, 모유수유한지 얼마 안되었는데..”
“우선 한번 안아 보세요. 아무리 달래도 우네요.”

나는 아이를 안고 젖을 물렸다. 주변을 보니 모든 선생님이 안절부절하며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10초나 지났을까. 아이는 울음을 멈추고 잠이 들었다. 내 품에서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엄마 냄새가 맡고 싶었나봐요. 엄마가 있어서 안정이 되는 거에요.”
“아..네.”

잠든 아기를 선생님께 건네고 나는 방으로 돌아왔다. 얼떨떨한 마음이 들기도 했고 선생님들께 죄송한 마음도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눈물이 나왔다. 정말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게 계속 눈물이 나왔다. 호르몬변화와 불안정한 상태였는지 모르겠지만 아기를 낳은 순간부터 나는 울보가 되었다. 나의 죽어있던 감정이 깨어난 것 같다. 남의 이야기에 크게관심이 없었던 나는 언론에서 아기를 버린 부모의 이야기, 학대 이야기 가 나오면 울분을 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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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굶고 다니지 말라며 아이가 내게 토스트를 해주었다. ⓒ이O영

지금은 그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고 밑으로 동생도 생겼다. 초등학생 자녀 둘을 키우는 워킹맘이 되어 하루하루 바쁘게 살고 있다. 여기까지 오는데 나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다. 아이돌봄서비스, 남편의 육아휴직, 양육상담 등 국가에서 엄마 아빠를 위한 지원들이 있었다. 아이들은 자주 아프기 때문에 기관에 보내도 돌봄이 필요한 순간이 많은데 이런 서비스가 없었다면 나는 민폐를 끼치는 워킹맘에 불과했을 것이다. 방학이 되면 긴 공백을 학원으로 채울 수 없는 부분이 있는데 아이의 식사까지 챙겨주는 것에 정말 감사함을 느낀다.

오늘 아침에는 아이가 매일 아침을 굶고 다니는 엄마가 걱정이 된다며 토스트 위에 치즈와 계란후라이를 해서 통에 싸주었다. 두유랑 과자도 챙겨 주었다.

“엄마가 굶는 거 싫어. 배 고프면 힘들고 짜증나잖아.”

마음에서 또 몽글몽글한 감정이 나왔다. 내 아이가 정말 많이 컸구나.

내가 아이를 키우며 크고 작은 기억들을 아이는 전부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기 때문에 아이를 키우는, 육아의 순간들의 힘듦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워킹맘은 여러 가지 역할이 혼재되기 때문에 늘 바쁘게 산다.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고 남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기 위해 더 많은 일들을 해내려고 한다. 아이도 잘 키우고 싶고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싶고 내 자신도 지키고 싶다. 이런 것들을 해낼 수 있는 것은 아이를 낳았기 때문이다. 일을 하면서도 문제가 발생하고 장애물이 생길 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애도 낳아 봤는데, 이걸 왜 못해!‘

바쁘게 살아가는 나를 보면 사람들이 대단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하지만 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후배들에게도 내가 늘 하
는 말이 있다. “저출산이라서 아이를 낳으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낳았으니까 너도 낳으라는 무책임에 아이를 낳으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성장시키기 위해서 아이를 낳으라는 거야. 여성에게 있어서 최고의 성장은 아이를 낳고 키우는 과정인 것 같아. 그래서 세상을 보는 눈도 넓어지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많아져. 그리고 생각보다 국가에서 지원되는 것도 많아. 나 혼자 키우는 것이 아니야.”

나는 아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나를 키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음도 넓어지고 인내심도 생기고 기다리게 된다. 먼 훗날 내가 세상을 떠날 때 아이들이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의 목표다. 내가 무엇을 해주지 않아도 아이들은 스스로 살아갈 힘이 점점 생기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아이 둘을 낳은 것은 내가, 여성으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