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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입선] 엄마를 보내며, 또 엄마가 되며(김O선)

관리자 2023.04.26 16:15 조회 91
내 나이 24살때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엄마는 세상을 떠나셨다. 많이 사랑하고 많이 효도했다고 생각했는데도, 돌이켜보니 한없이 못해드린 것이 많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15년이상 흐른 지금, 나는 세 아이들, 그것도 세 쌍둥이의 엄마로 이 곳, 엄마의 고향 신당동에 서있다.

“아니, 친정엄마 없이 어떻게 세쌍둥이를 키워요?”

내가 7년동안 가장 많이 들은 말이었다. 울고 싶고 포기하고싶었던 순간도 많았던 7년, 어느때보다도 치열하게 살았던 시간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한 달 여전, 나는 가슴이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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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쌍둥이 임신, 그리고 힘겨웠던 육아... 하지만 이젠 웃으며 말할 수 있다. ⓒ김O선

말로, 글로 어떻게 설명하랴? 나의 그 치열했던 모든 순간을. 세 아이들이 예상치못하게 나에게 오고, 게다가 일찍 세상에 태어나며 몇 달을 한치앞을 모른채 병원 중환자실 신세를 지고, 퇴원후에도 미숙아라는 이름으로 온갖 병원을 전전하였고, 나이질만하니 코로나로 갇혀있던 그 시간들. 하지만, 어느덧 그 모든 시간을 “서울시 행복엄빠”이라는 공모전을 보고 아이들의 이야기를 떠올릴수 있는 것을 보니 이제는 행복한 순간이라 감히 말할 수 있으리라.

처음 쌍둥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참으로 신비롭고 감사했다. 1주일동안 극심한 입덧에 시달렸는데, 그 후 다시 병원에 갔을 때, 의사는 나를 보며 “한 명이... 분화해서 더 생겼어요” 라는 놀라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기쁨과 놀라움도 잠시, 나의 건강, 아이들의 건강, 그리고 키우는 문제까지 온갖 복잡한 문제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20주가 넘어갈 때 이미 만삭처럼 불러진 배로 그래도 열심히 일하며 하루하루 지냈다. 하지만 20주 후반이 넘어가며 위기가 계속찾아왔다. 조산의 위험성을 끊임없이 들으며, 아이들을 위해 재택 근무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셋이 지내기에는 나의 뱃 속이 턱없이 부족했을 것이다. 30주가 갓 넘어 조금 안심할 때 쯤, 아이들이 이른 신호를 보냈다. 나는 2주동안 병원 침상에 누워서 잘 씻지도 못하고 화장실 가는것조차 죄스러웠다. 나와 병원의 각고의 노력에도 아이들은 너무 일찍 세상 빛을 보았다. 태어나자마자 구급차에 실려 중환자실에 누운 내 팔뚝보다 작던 아이들, 그런 아이들을 돌보느라 내 몸이 아픈지도 몰랐다. 

그로부터 7년의 시절은 정말 한 편의 영화로 해도 모자랄 것이다. 한 명도 키우기 힘들다는데, 세 아이들이, 그것도 아픈 아이들이 병원을 오가며 누워있어 온 가족이 비상이었다. 우리 엄마 대신 동원된 시어머니, 시아버지, 우리 언니, 아빠......... 그리고 도우미 이모님들...... 남편과 나는 하루하루 울며 기도하며 시간을 보냈다.

사람들은 우리가 지나가면 늘 이목 집중이었다. “딸이 세 명이니 키우기 좋겠네”, “자기네끼리 놀죠?” “어머, 복받았다~” 라는 말을 할 때마다 울화통이 치밀정도로 그런 ‘복 받았다’ 느끼는 순간은 오지않았고, 고등학교 때 만난 나의 착하고 풋풋했던 남편이 ‘정신과 치료를 받을까? ‘라고 물어 볼만큼 우리의 시간은 길고 고통스러웠다. 그러던 중 코로나까지 시작되어, 아이들이 어린이집이나 유치원도 못가면서 그 시간은 길어진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식탁에서 밥을 먹던 남편과 나는 갑자기 누군가의 외침에 불현듯 깨닳았다. “어! 남편, 우리 서로 세 마디 이상 하면서 밥을 먹고 있어!”

그랬다! 마법처럼 그 순간이 왔음을 깨닳았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귀로 들어가는지 모르며 쑤셔넣었던 식사 시간이었는데, 어느 순간 나와 남편이 이야기를 하며 밥을 먹고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세 아이들은 저마다 거실에서 다른 자세로 책을 보고있었다. 아! 정말 놀라운 순간이었다.

그 깨닳음 후에 우리는 그 긴 터널에 빛이 들어옴을 보았다. 앞으로도 이 아이들을 키우는 많은 순간들이 남아있겠지만, 적어도 우리 함께 고민하고, 웃고, 울 수 있는 그런 생각의 여유가 생겼다는 사실이 북받혀 올랐다. 그 터널안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그 안에서 함께 노력해준 우리 가족, 그리고 많은 이웃들과 사회의 지원과 함께 아이들은 조금씩 조금씩 하나의 인격체로 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참 감사하게도 지금은 그 누구도 미숙아라고 의심하지 못할만큼 아이들은 건강하게 자라주었다. 이 역시 가족들의 노력과 사회의 든든한 지원덕분이다.

그리고 어느새 .......엄마를 떠나보내던 추운 계절에 갇혀있던 꽁꽁 언 나의 마음이 따뜻하게 녹아, 나를 어엿한 ‘엄마’, 그리고 학부모로 만들었다. 어린 시절의 엄마가 밟았던 이 신당동 땅을, 내가 엄마가 되어 밟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아이들과 함께 산책하면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다. 그리고 또, ‘너무 좋아보인다’, ‘복 받았다~’ 하며 같은 반응일색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의 대답은 달라졌다.

“네, 저희는 행복해요, 정말 운이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