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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입선] 애착이불(김O식)

관리자 2023.04.26 17:22 조회 49
언제부터인가 보름달이 뜨면 꼭 밖으로 나가 두 손을 모으고 소원을 빌었다. 평생 사랑하고, 평생 사랑받게 해주세요. 나는 정말 그것 말고는 바라는 게 없었다.

나는 언제나 중간은 갔다. 아주 특별히 잘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모자란 것도 없었다. 몇 명의 친구들과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냈고 적당한 대학에 진학을 했다. 평범하게 연애를 했고 적당한 직장에서 월급을 받았다.

좋은 회사에 들어가는 것도, 로또에 당첨되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평생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기만을 바랐다.

해피엔딩의 멜로영화는 주인공이 행복한 결혼을 하며 끝이 나더라. 결혼이 마치 해피엔딩의 시작인 것처럼. 실제로 결혼은 매우 행복한 일이었고 깜깜했던 내 미래가 밝아지는 것 같았다. 안정적이고 정말 잘 살아온 어른이 되는 것만 같았다.

결혼생활은 연애의 연장처럼 느껴졌다. 매일이 멜로영화의 시작마냥 즐거웠고 첫아이를 임신하고 낳고 기르면서 내 평생의 행복이 여기에 있구나 생각했다. 이 아이가 두 돌이 조금 지났을 때 둘째아이가 찾아왔다. 22년 1월, 임신을 확인한 날, 신랑은 지방발령이 났다. 22년 3월, 33개월이 된 첫아이가 어린이집에 처음 등원을 했다. 집 가까운 곳에는 어린이집이 없어서 매일 차로 등하원을 시켜야했다. 아이는 안가겠다고 울고, 나도 울고, 그래도 억지로 차에 태웠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김창완의 목소리와 아이의 울음소리가 섞여서 모든 음악이 슬프게 들렸다.

22년 4월, 아이가 코로나에 걸렸다. 어린이집을 쉬고 가정보육을 시작했고 곧바로 나도 코로나에 걸렸다. 신랑은 집에 올 수가 없었고, 나는 임신 중이라 약을 먹을 수가 없었다. 아프지만 아이를 돌봐야 했고, 나는 굶어도 아이는 먹여야 했다. 코로나는 전 국민이 걸려야 끝난다고 했던가. 

22년 5월, 아이가 중이염에 걸렸다. 중이염은 심한 질병은 아니지만 병원에서 쪽쪽이를 끊어야 한다고 했다. 이 친구에게 엄마보다 소중한 두 가지가 쪽쪽이와 애착이불인데, 그 중 하나를 떠나보내야만 했다. 낮이고 밤이고 울었고 특이 밤이면 쪽쪽이를 달라며 애원했다. 나는 쪽쪽이를 버렸다고 했지만 차마 버리지 못하고 찬장깊은 곳에 두었는데, 매일 밤 그걸 꺼내고 싶은 마음과 싸워야 했다.

22년 6월, 겨우 쪽쪽이를 끊었더니 아이가 장염이 왔다. 하루에 대변을 15번을 쌌다. 기저귀를 갈면 똥이 나오고 기저귀를 갈면 똥이 나왔다. 온 집안에 똥냄새가 진동을 했다. 하루 종일 뛰어도 기운이 넘치던 아이가 마룻바닥에 배를 붙이고 누워서 눈을 감았다 떴다 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22년 7월, 아이가 수족구에 걸렸다. 온 몸이 울긋불긋하게 되었고 아이는 계속 긁었다. 목구멍에도 수포가 올라와 밥을 먹지 못하고 물을 삼키는 것도 힘들어했다. 며칠을 밥을 먹지 못하니 아이는 말라갔고, 아이 등을 만지면 날개뼈가 만져졌다.

22년 8월, 둘째아이의 출산 한 달 전이었다. 첫째의 건강을 위해 한의원에 갔다가 야경증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아이는 밤에 자다가 깨면 2시간~3시간을 계속 울었고, 나는 만삭의 배에 이 아이를 올려놓고 밤새 달래야 했다. 화도 내고 소리도 질렀다. 거의 6개월을 매일 새벽마다 2시간씩 이유 없이 울어대니 미쳐버릴 노릇이었다.

이 모든 사건들에 나는 아이와 단둘이었다. 서울로 출근하던 신랑은 지방 발령 중 이었고 매주말마다 집에 올수는 없었다. 내가 얼마나 아이를 끌어안고 울었던지. 그럼에도 또 내가 얼마나 아이를 끌어안고 울지 않으려 했던지.

22년 9월, 둘째 아이가 찾아왔다. 평일에 신랑이 없을 때 진통이 오면 어쩌나 걱정이 무색하게 예정일보다 열흘이나 빠른 추석 당일에 얼굴을 내밀었다. 이 조그만 아기를 데리고 집으로 갔을 때 첫아이는 무척이나 스트레스를 받았나보다. 밤에 잠꼬대로 아가 나빠를 반복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때마다 나는 애착이불을 코에 얹어주었다. 아이는 애착이불을 끌어안고 냄새를 맡으면 안심하며 다시 잠에 들었다. 어느 밤에는 그런 생각을 했다. 저렇게 끌어안기만 하면 마음이 안정되는 이불이라니. 그런 요상한 물건이 있다면 나도 하나 가지고 싶다고.

둘째 아이는 태어날 때 골절이 있었고, 이 때문에 생후 2개월 동안 팔을 움직이지 못하게 해야 했다. 머리에 찌그러짐이 있어서 재활병원에 다니게 되었고, 100일부터는 콧물이 멈추지 않았다. 감기약을 4개월을 먹였다. 당연히 둘째 아이는 더욱 안쓰러웠고 더욱 손이 많이 갔다.

큰아이가 변기에 앉아서 대변을 보면서 나에게 물었다. 아가가 엄마를 힘들게 하느냐고.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우물쭈물 하더니 그럼 자기가 엄마를 힘들게 하느냐고 묻는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는 그것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아이는 바로 생긋 웃었는데 눈물은 내가 대신 흘렸다. 변기에서 내려온 아이는 “엄마, 나랑 같이 아가 토닥토닥 하자.”라며 나보다 더 부모 같은 말을 한다.

다음날 어린이집을 가면서 “나는 어린이집 가기 싫어.”라고 하길래, “그럼 오늘은 집에서 쉴까?”했더니, “아빠도 일하러 가기 싫지만 매일 가잖아. 나도 그래.”라며 씩씩하게 나선다. 나보다 더 멋졌다.

가끔 가만히 앉아 눈물을 떨어뜨리는 나를 보면 조용히 안아준다.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 라며 튀어나온 퉁명스러운 말에, “엄마도 이렇게 하잖아.”라는 다정한 대답.

몸이 너무 힘든 날, 아이의 저녁식사도 챙겨주지 못한 채로 잠자리에 누워 있으면 조용히 옆에 누워서는 자기 엉덩이를 내 배에 가져다댄다. 작고 말캉한 엉덩이가 튼살과 주름으로 못난 내 배에 닿아서 꿈틀댄다. 그렇게 같이 잠들고 일어나면 마치 대단한 위로를 받은 것 마냥 기운을 차리고 일어나게 된다.

어느 날에는 꽃을 가져와 사랑해 하며 설레게 하고, 엄마 좋아 엄마 좋아 라고 하루 종일 이야기 한다. 이렇게 격렬하게 사랑받고 끊임없이 고백 받아 본 적이 있었던가. 그저 눈을 보기만 해도 이 아이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가 보여서, 내 눈에도 내 사랑이 보일지를 염려하게 되고. 그저 손가락 하나를 잡는 아이의 손에서 나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가 보여서, 아이를 쓰다듬는 내 손에도 소중함이 느껴질지 걱정하게 된다.

아이들은 그렇다. 나보다 더 부모 같고, 더 멋지고, 더 다정하며, 내 삶을 더욱 애써 살게 만든다. 최근에는 큰아이가 애착이불을 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마음이 불안할 때는 애착이불을 끌어안기보다 왜 불안한지를 생각하고 나와 대화를 이어간다. 잠들기 전에 애착이불 냄새를 맡는 대신 내 손을 꼭 잡고 눈을 감는다. 애착이불 없이 스스로의 감정을 컨트롤 하려고 노력하는 게 너무 대단하다. 툭하면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나를 보면서, 어떻게 저렇게 강하게 자랄 수 있었나 싶다.

잠들기 전에 내 손을 꼭 잡던 아이가 나를 빤히 바라본다. “눈 감아야지.” 하니까 “할 얘기가 있어.”란다. 나도 아이를 빤히 바라본다. 아이는 싱겁게 “엄마 좋아.” 하고선 웃으며 눈을 감는다. 싱거운데 달콤하고, 새삼스럽게 기쁘지만 매일 듣고 싶은 말이다.

어느 밤에는 그런 생각을 했다. 저렇게 끌어안기만 하면 마음이 안정되는 이불이라니. 그런 요상한 물건이 있다면 나도 하나 가지고 싶다고. 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눈물을 참아오고 얼마나 많은 감정을 가라앉혀 왔는지. 이 아이를 애착이불마냥 끌어안고 냄새 맡고 마음을 가다듬어 왔는지. 여전히 나는 이 아이를 끌어안기만 해도 슬픈 생각이 사라지고, 웃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면 이유 없이 행복이 밀려오는, 그 요상한 것을 이미 데리고 살고 있지 않은가.

나는 아마 이 아이를 끊임없이 사랑하고 끊임없이 사랑 받는 일로 평생을 살게 되겠지. 내가 보름달을 바라보며 유일하게 빌었던, 사랑으로 가득 찬 삶은 이 아이들로 인해 가능해진다. 꽃이 핀 풍경을 바라보는 게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꽃이 핀 풍경 안에 있는 아이를 바라보는 건 벅차오르게 아름다운 일이다. 너무 힘든 일이 있어도 그에 따른 보상이 달콤하면 하나도 힘들지 않다고 하던가. 그렇다면 육아는 지나고 보면 하나도 힘들지 않은 사건들, 내 평생 가질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순간의 연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