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이런 상황에서 결혼 꼭 해야 하니? 미루면 어떨까?”
2014년, 내가 처음 결혼을 한다고 사람들에게 말했을 때, 축하한다는 말보다 더 많이 들었던 말이다. 실상 그 당시 아버지의 사업이 최종 부도 처리가 되었고, 오래 살고 있던 집은 압류되었으며, 동시에 다니고 있던 직장은 구조조정 중임에 공장에 사고가 나, 울산으로 무기한 파견되었던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 모든 일이 결혼 4개월 전에 일어났기에 그러한 염려의 소리가 서운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런 주변에서 일어난 환경으로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을 타의로 미루게 된다면, 결국 현실을 원망하면서 시작하지 않을까 하는 내 생각이 더 컸었다. 결국, 나는 누구나 들으면 알 수 있는 대기업에 다니는 것을 그만두고, 아내의 직장 근처에 있는 중견기업으로 이직하는 동시에 같은 달 예정된 날짜에 결혼도 강행했다. 즉, 나의 결혼에서 사랑은 그 누구보다 컸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만 경제적 여건, 축복받는 환경과는 큰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든 이겨내 보겠다는 자신만만한 다짐으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아무 도움 없이 빠듯한 살림에 발버둥치는 묵묵한 아내를 바라보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 와중에 아내 또한 회사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고, 나 혼자만의 소득에 의존하게 되었다. 당연히 육아는 저 먼 이야기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때, 새로운 회사의 업무 적응에 피로도가 극에 달하고, 부모님의 급전 요구에 대한 압박, 통장 잔고가 부족하여 관리비도 못 냈던 처지에 고객과의 술자리로 집에 늦게 들어간 후 푸념을 늘어놓던 순간, 아내가 말했다.
“진짜 그렇게 힘들면 회사 그만둬. 이제 자기 연민은 끝내야 하지 않을까?”
갑자기 돌을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당당하게 시작했던 부부의 삶에서, 특히 아내와 세상에 둘만 있는 듯한 어려운 상황에, 자기연민을 보인 내가 너무나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때 다짐했다. 이미 일어난 일은 돌릴 수 없다고, 힘들다 말하기 전에 제대로 힘이나 내보라고, 그리고 연민에 빠지기에는 좋은 학력에 대기업도 다녔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했는데 불만 갖는 건 어리석은 거라고. 아내와 손을 잡고 말했다. 꼭 이겨내서 진짜 가족을 만들자고.
그렇게 이를 악물고 살다가, 나는 직장에서 안정도 찾고, 아내도 좋은 직장을 다니게 되며 그렇게 꿈꾸던 우리의 집도 가지게 되었다. 그와 함께 2019년 여름, 아내의 뱃속에 새 생명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문득, 이제 세상이 우리 둘에게 잘해주려 하는게 아닐까 라는 엉뚱한 생각을 했었다. 적어도 아이가 우리를 통해 생겼다 보는 것보다, 이제서야 준비를 한 우리에게 아이가 찾아온 듯한 느낌이었다.
2020년 1월에 지우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딸은 태어났다. 정말 하늘에서 찾아온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천사 같은 모습으로 건강하고 아름다운 딸로 우리에게 와 주었다. 아내도 나도 경제적으로 많이 안정이 되어서 남부럽지 않게 키울 수 있겠다는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우리 딸의 출생과 동시에 코로나 펜데믹 공포가 시작되었다. 거의 모든 회사가 재택 근무로 전환해 우리 가족또한 그 어떤 선택지도 없이 세 명 안에서만 해결해야 되는 상황에 놓였다. 그러다 나의 영업직군 특성상, 어쩔 수 없이 잦은 외근을 할 수밖에 없었고, 아내는IT계열회사라 재택근무지만 각국의 시차를 넘나드는 회의와 육아를 동시에 해야 하는 버거움이 있었다.
출산 후 회복도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 아내는 가중되는 스트레스와 바람을 느끼는 여행도 못하는 것에 우울해지고 있었다.
아내가 가장 힘들어 했던 2021년 가을, 그 편하지 않은 상황에 대해 가까운 선배에게 고민을 털었을 때 조언을 들었다. 지금 이 순간은 그 어떤 것들 과도 바꿀 수 없다고, 돈은 걱정하지 말고, 지금은 행복을 찾으라고. 세 딸을 키운 어른의 말에서, 혹시나 너무나 경제적으로 잘 살아보려 했던 내 의지가 아내에게 부담이 되지 않았을까 반성하게 되어, 집으로 돌아가 아내에게 말했다.
“직장은 잠깐 쉬는 게 어때? 나도 진급했으니 그리 어렵진 않을꺼야. 그리고 너의 커리어도 지금 이 시기에 잠시 쉬어도 재취업 때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꺼야. 난 절대 네가 그동안 쌓아 온 것들이 잠시 멈춘다고 사라지지 않을 거라 생각해”
그 말에 아내는 직장을 그만두길 결정했다. 그 이후 아내는 지우 또래의 동네 어머니들과 더 긴밀히 소통하고 아이에게 더 많은 경험의 기회를 주게 되었다. 그에 따라 우리 딸도 더 예쁘고 건강하게 성장했고, 아내도 몸과 마음이 점점 건강해지고 있었다.
어느덧 코로나가 다소 진정이 된 후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 주로 대화의 주제는 육아였는데 그 당시 가장 많이 나온 말이 ‘애 때문에 뭘 할 수가 없어’였다. 집에 들어와 잠들어 있는 아이를 보는데, 이런 사랑스러운 존재가 제약 요소가 된다고 친구들과 말한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졌다. 곰곰이 생각했다. 이 아이 ‘덕분에’라는 생각은 어떤 변화를 만들까?
나는 아이의 몸무게를 재었다. 12kg. 그래 이걸 나의 작은 ‘덕분에’ 캠페인으로 시작해보자는 마음을 먹었다. 아이의 몸무게를 기반으로 새벽에 운동을 나가기 시작했다. 내 딸은 그저 성장해주는 것만 으로 나에게 강한 동기부여가 되었고, 그동안 해왔던 꾸준한 운동의지보다도 지속적이어서1년 넘게 새벽형 인간이 되었다.
그러던 중, 어떤 회사에서 좋은 제안이 와 면접을 보게 되었다. 최종 면접을 보던 중, 마지막 질문은 ‘당신은 개인 시간을 어찌 보내냐’는 것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진심으로 제 딸을 사랑합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아이 ‘때문에’ 개인 시간을 갖기 힘들다 말하지요. 전 그 ‘때문에’라는 표현이 싫었습니다. 그 사랑스러운 존재가 내 시간을 뺏는 핑계가 되어서 안된다고 봅니다. 그 아이 덕분에 매일 새벽에 운동을 합니다. 때로는 너무 피곤하지만 잠든 아이 얼굴을 보는 것만큼 동기부여가 강한 것도 없더군요. 전 그 덕분에 강하고 행복한 사람이 되고 있습니다. 이 회사에 다니게 된다면, 업무에서도 저는 ‘덕분에’라는 자세로 여러분들과 일하고 싶습니다.”
면접자들의 잠시 침묵이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 그동안 들었던 말 중 가장 멋진 말이라고 해주었다. 그렇게 난 또 내 딸 ‘덕분에’ 더 좋은 자리에서 행복하게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다들 힘들다고 한다. 집을 구하는 것도, 결혼을 하는 것도 당연히 어떤 것도 쉽지 않다. 하지만 진짜 사랑을 할 때만이 그 현실을 극복하려는 힘을 낼 수 있다. 힘을 내고 싶다는 의지는 사실 어려운 일에 맞섰을 때 그 의미가 커진다.
적절한 지 모르겠지만 육아에 주저했던 사람들에게 자동차를 예로 들어 말하고 싶다. 차를 사는 것도 큰 부담이지만, 차는 유지할 때가 더 부담임은 누구나 다 안다. 기름값, 자동차세, 세차, 기타 수리비 등......
그러나 그 누구도 우리가 힘들게 가진 자동차를 탓하지 않는다. 그리고 차를 살 때 그 유지비를 먼저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자동자와 여행하는 멋진 순간과 가지고 있는 멋진 자신을 떠올린다. 자동차와 만들 수 있는 추억은 대부분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았을 때 갈 수 없는 먼 곳 또는 무거운 짐과 함께 했을 때다. 비용과 기쁨 사이에 저울질을 그 기계를 결정할 때도 좀처럼 하지 않는다. 그것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행복의 차이는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4살이 된 지우를 보며 느낀다. 과연 이 사랑스러운 딸 없이, 나의 의지력과 동기 부여, 업무와 새로운 기회를 갖는 성취감이 가능했을까? 나 역시 육아 전에 주저했지만 지난 4년 가까운 시간을 함께 하며, 이 작은 생명이 오히려 나를 키우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에 난 오히려 딸에게 ‘커서 멋있는 어른이 될게’라 다짐하고 행복해 하며 성장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