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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입선] 엄마.. 포기하지마 다 잘될거야!(김O인)

관리자 2023.04.26 18:14 조회 61
나에게는 3명의 아이들이 있다. 하늘의 별이 된 10살이 되었을 쌈쌈이, 그리고 눈부시게 반짝이고, 팔딱거리는 7살 쌍둥이 둘... 지금도 가끔은 내 옆에 이런 아이들이 함께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나에게는 임신, 출산이 참으로 어렵고, 막막하고, 모르겠고, 답답하고, 좌절하고, 눈물나는 그런 과정의 연속 이었기에... 엄마가 된 지금 행복하고, 감사하다.

별이 된 쌈쌈이

대학교 3학년, 5:5 미팅에서 처음 만난 남편과 8년 연애 끝에 결혼하였다. 연애도 오래 했고 둘 다 아이들을 예뻐했기에 바로 임신 준비를 하였으나, 생각만큼 빨리 아이가 와주지 않았다. 1년 후 병원 검진 결과 자연으로는 임신이 힘들다는 소견을 듣고 바로 시험관 아기 시술하기로 했다. 그 당시 시험관이라는 단어도 생소했고, 시술만 하면 아기가 생기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저 나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 하는 들뜬 기분으로 난포 키우는 주사, 난자채취, 수정배아 이식 등등. 여러과정을 잘 이겨내니 나에게도 2014년 봄날, 그토록 원하던 아이가 찾아왔다. 태명은 3월 3일 결혼기념일을 따서 ‘쌈쌈이’라고 지었다. 정기검진에서 초음파 사진상 커가는 아기 모습을 보면서,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르고 회사 가는 일상도 콧노래가 나올 만큼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그렇게 순조롭게 쌈쌈이를 만날 것이라는 생각도 잠시, 임신 중기 초음파상 항문 패쇄가 보인다는 소견과 함께 ‘바테르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상세 초음파 분야에 유명하신 교수님이 계신다는 대형병원으로 다시 초음파 예약을 잡고, 기다림 끝에 재검사하였으나, 결과는 다르지 않았고 식도 패쇄까지 보인다는 추가 소견을 받았다. 오진 일수도 있다는 한 줄기 희망은 사라졌고, 교수님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횡설수설 물어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전부였다. 가족들은 포기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얘기도 했고, 나 또한 아픈 아이를 낳아서 어떻게 할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 순간 “엄마! 포기하지마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나와서 간단하게 다 치료할 수 있는 건데 왜 포기하려고 해”라는 교수님에 단호한 말을 듣고 ‘그래! 낳자’라는 결심을 했다.

당장 쇄 항(항문폐쇄) 수술 전문가 교수님이 계시는 병원으로 전원을 했고, 출산과 동시에 수술할 계획을 잡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임신 8개월쯤 되었을 때, 배가 너무 뭉치고 수축감이 있어 입원하였고, 식도패쇄로 아이가 양수를 먹고 뱉지 못해 배는 남산만큼 불러 임의로 양수를 뽑아내는 시술을 반복했다. 누워만 있는 입원 생활하던 어느 날, 용변을 보려 화장실에서 힘주던 찰나 무언가 쑥내려오는 느낌으로 비상호출 벨을 눌러 응급수술을 받게 되었다. 아직 주수가 다 채워지지 않은 터라 지금 나오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

회복 후 병실에는 친정엄마가 와 계셨고, 남편이 나지막이 ‘쌈쌈이가 나와서 30분간 숨을 쉬지 못했대... 지금은 겨우 숨만 쉬게 조치해 놓은 상황인데 오늘을 넘기지 못할 거 같아.’ 라는 말을 전했다. 말을 듣는 순간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그냥 멍해 있었던 것 같다. 남편은 응급소아과 교수님에게 자주 불려갔고, 하루가 지나 아이가 힘을 내고 있다고 교수님은 엄마를 설득해 아기를 꼭 보라고 남편에게 말을 했었다고 한다. 그전까지 나는 아기 보기가 두렵고, 막연하게 무서운 감정이 들어 안보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교수님은 이런 경우를 많이 겪어본 터라 엄마들이 나중에 후회를 많이 했다고 꼭 아기를 봤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오후쯤 되었을 때, 쇄항 전문 교수님이 인턴 몇 명과 우르르 병실에 오시더니 쇄항 수술서에 동의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동의를 안 하면 임의로 수술을 진행할 것이라고 통보를 하고 사라지셨다. 엄마괜찮냐는 말 한마디 물어보시지 않고 하실 얘기만 하시고 가는 교수님이 그냥 미웠다. 쇄항치료는 태어난 지 3일 안에 하지 않으면 장내 가스가 차서 위험하기에 교수님은 본인에 임무에 충실한 결정을 했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전해 들으신 응급소아과 교수님은 남편에게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아기가 숨을 못 쉬었기 때문에 기적으로 다 치료가 된다 하더라도 99% 장애가 있을 수 있다는 얘기와 함께 부모의 삶도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하루가 1년 같은 시간이 흘러 밤 9시쯤 되었을까... 남편에게 쌈쌈이를 보러 가겠다고 하고 휠체어를 타고 신생아 중환자실로 향했다. 남자 의사와 간호사 한 분이 쌈쌈이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었다. 그곳에는 털모자를 쓰고 코는 아주 오똑하며, 작은 인형같이 생긴 너무 사랑스러운 모습의 쌈쌈이가 숨을 쌕쌕거리며 누워있었다. 안아보라는 선생님 말에 부서질 듯 작은 쌈쌈이를 안는 순간...

따뜻한 온기와 세상을 다 얻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렇게 쌈쌈이는 엄마 품에서 조용히 잠들어갔다. 나중에 교수님은 하루를 못 버틸 줄 았았는데 엄마를 보고 가려 안간힘을 내었던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1년 남짓 동안 큰 기쁨과 슬픔을 모두 주고 쌈쌈이는 하늘에 반짝이는 별이 되었다.

2년 반의 기다림... 8번의 시술 후 찾아온 기적

쌈쌈이를 보낸 후 3개월 동안 몸조리 후 회사 복귀를 하였다. 주변 사람들은 쌈쌈이의 얘기를 일절하지 않았다. 그때는 너무 서운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일이 되어 버린 것이... 지금 생각해 보면 주변 분들도 아주 많이 조심스럽게 대했을 것이고, 상기시키지 않으려 무던히 애썼던 것 같다.

나의 도전은 다시 시작되었다. 한 번에 시험관 시술에 성공했기에 다시 시도하면 바로 아기가 생길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앞날에 일어날 일들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다시 시도한 시험관 시술은 실패로 끝났다. 또한 자궁 내막에 유착이 생겨 착상을 방해할 수 있는 상황이라 유착술도 시술하게 되었다. 그렇게 회사에 다니면서 난임병원 진료를 보고, 또 시술하는 상황들이 반복되니, 아무리 팀장님께서 배려해준다고 하셨지만 나 스스로가 굉장한 미안함과 부담감
으로 퇴사하고 진행할 수 밖에 없었다.

대학 졸업 후 한 번도 쉬지 않고 일해 왔고, 일의 특성상 단절이 생기면 뒤쳐진다는 생각으로 쉬는 동안 불안감은 늘 같이 따라다녔다. 병원은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으나, 시도한 횟수만큼 실망감과 좌절이 너무 큰 아픔으로 쌓였다. 배란 주사를 맞고, 유착술을 하고, 난자채취를 하는 것들은 얼마든지 참고 견뎌낼 수 있었으나, 결과를 기다리고 피검사 후 임신 수치가 나오지 않았을 때의 그 허전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정신적인 고통이었다. 길을 가다 유모차를 끌고 가는 아기 엄마들을 볼 때면 너무 부러웠고, 나도 엄마라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시댁에서는 고생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이제 그만하고 신생아 입양해서 키우면 어떻겠냐는 말씀을 하셨다. 어떤 마음에서 하신 말씀인 줄은 알았지만, 나에게는 너무 서운하게 들려왔다.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다짐과 함께 언젠가는 꼭 아기가 와 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2년 반이라는 시간이 흘러 8번의 시술 끝에 2017년 어느 봄날, 임신 테스트기의 2줄을 확인했고 2개의 콩알만 한 착상된 아기들을 만날 수 있었다. 중간에 2줄을 확인하고도 피검사 수치가 떨어졌던 경우가 있어서 쉽사리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건강하게만 자라달라는 마음으로 ‘강함이’와 ‘바름이’라는 태명을 지었다. 안정 주수에 접어들었을 때 쌍둥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입덧이 너무 심했다.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김치 냄새가 너무 역했고, 구토를 자주 하면서 주치의는 힘들게 참는 것보다는 입덧약을 먹는 것이 더 낫다고 약을 처방해 주었다. 입덧이 심한 아기들이 더 건강하다는 소리를 들었고, 이 정도는 아기를 못 가졌을 때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마냥 행복한 시간을 보냈었다.

입덧이 좀 나아졌을 때는 생 토마토 주스, 양꼬치구이, 천도복숭아 냄새들이 신기하게도 순간 코 옆을 스치면서 남편의 부지런한 배달이 시작되었다. 어떻게든 구해서 오려는 남편에 마음에 말은 안했지만 큰 감동을 받았었다.

정기검진할 때마다 각종 검사들을 별 탈 없이 잘 통과해 주면서 한시름 마음을 놓을 때, 다시 시련이 나의 앞길을 막으려 했다. 20주 검진 날 초음파로 보시고 나서 교수님이 간호사에게 조용히 휠체어를 준비하라고 하셨다. 교수님은 침착한 말투로 자궁문이 거의 다 열려서 바로 묶는 응급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지금 아기들이 나오면 살지 못한다고, 자궁문을 묶는 수술을 하면 30주 이상까지도 버틸 수 있다고 하셨다. 이때 심정은 왜 나에게 자꾸 이런 일이 반복될까 하는 참담함과 걱정밖에 없었다. 그래도 항상 옆에서 이 모든 상황을 고스란히 나눌 수 있는 동지, 남편이 있어 큰 버팀목이되었다.

그 길로 나는 휠체어를 타고 바로 수술대로 향했고 수술 후 병원 입원을 주기적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용변 보는 것 외에는 누워서 생활했고, 수축이 있을 경우 수축 억제제 주사를 맞으면서 수축을 잡아야 했다. 병원 생활이 오래될수록 너무 퇴원하고 싶었으나, 수축이 안 잡히고 이상이 없을 때만 퇴원을 허락해 주셨기에 병원 생활이 길었다. 처음엔 30주까지만 버티면 인큐베이터에서 살 수 있다는 말씀에 30주가 되었을 땐 너무 기뻤다. 그리고 이대로 만삭까지 잘 버티다 출산해야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입, 퇴원을 반복하며 누워서 생활하는 동안 친정엄마의 무한한 대접을 받으며, 버티기도 하여 2017년 추석을 보낸 다음 날, 36주 5일 (쌍둥이는 36주가 만삭으로 봄) 양수가 터져 구급차를 타긴 했지만, 만삭까지 버티고 강함이와 바름이를 낳게 되었다. 1.9kg으로 태어난 두 아이는 인큐베이터에서 치료해야 했고, 강함이는 출산 시 균에 노출되어 열이 떨어지지 않는 뇌척수막염 증세도 보이면서 3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치료해야만 했다.

이렇게 겨우 건졌다는 표현을 농담 식으로 할 정도로 힘겹게 가진 우리 아이들은 지금 내 옆에서 쫑알거리며, 엄마 아플 때 걱정도 해주며, 누구보다 활달한 성격을 가진 말괄량이 두 자매 쌍둥이로 자라나고 있다. 작게 태어났지만, 입원 한번 하지 않고 건강하게 잘 자라주는 것에 항상 감사하고 있다. 종종 쌈쌈이 오빠 보고 싶다는 얘기도 하면서, 오빠에게 전화해 보라는 얘기를 할 때면 뭉클하기도 하지만 쌈쌈이 몫까지 건강하게 자라주어서 더 바랄 것이 없다.

나의 임신, 출산 과정은 산을 넘고 또 넘는 과정의 반복이었지만, 지금도 나 자신에게 고마운 점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 다시 같은 상황들이 온다고 하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 신념은 그대로일 것같다. 그리고 간절히 원하면 언젠가는 들어주심을 믿고 있다. 평범한 일상이 계속되면 좋겠지만 살아가면서 또 다른 고난과 시련이 올 때 헤쳐 나갈 수 있는 단단한 힘이 우리 가족에겐 생겼다.

나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예비 엄마들에게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꼭 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