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 꿈에서 달팽이가 되어서 아빠 가방에 몰래 들어가서 회사에 같이 갈 거야!”
“난 아주 커다란 바위가 되어서 아빠 다리에 찰싹 붙어서 회사에 못 가게 할 거야!”
형에게 뒤질세라 둘째 태현이도 나를 옴짝달싹 못 하게 한다. 잠들기 전 꿈 이야기는 최근 들어서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로 다소 뜸해졌다.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 잠들기 전 꿈 이야기가 이렇게 무럭무럭 자라왔다. 더 잘 자라고 이어서 불러주던 자장가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좁고 좁은 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으로 시작하는 공식 자장가 첫 번째 노래가 끝날 무렵이면 세현이는 이내 잠든다. 형처럼 일찍 잠들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태현이도 결국 두 번째 노래 ‘난... 난 꿈이 있어요...’가 끝날 땐 잠들고 만다. 새근새근 들려오는 두 아이의 숨소리로 하루가 마감된다. 아빠로서 더없이 행복한 순간이다. 또, 가슴이 벅찬 순간이다.
결혼 5년 차, 세현을 마주했다.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한 첫 번째 각오는 아내의 산부인과 진료를 늘 동행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인스턴트 대신 손수 만든 머핀과 쿠키를 수시로 구웠다. 배는 점점 불러왔고, 초음파 사진도 그만큼 더 선명해졌다. 7시간의 진통은 아침 10시에 이르러 끝을 맺었다. 새빨간 피가 얼룩덜룩 묻은 내 아이가 태어났다. 그 모든 과정을 곁에서 함께했다. 그 어떤 미사여구를 모아놓는다 해도, 마법의 시간이었다. 갓 태어난 아이는 우렁차게 울고 있었다. 손가락 발가락 쉴 틈이 없었다. 감정을 억누르고 앞을 잘 보냐고 간호사에게 물었으나 미소만 짓고 말았다. 태현이는 제왕절개가 불가피했다. 3년 전 건넨 질문을 꾹 참고 아꼈다.
임신 기간 중에 몇 차례 꿈을 꾸었다. 악몽이었다. 선천성 질환으로 한쪽 눈에 시력이 없이 태어난 내 신체 구조가 아이에게 유전될까 두려웠다. 눈을 채 뜨지 못한 찡그린 얼굴, 나와 마찬가지로 외눈박이 모습... 여러 형태로 꿈속에서 드러났다. 다행히도 기우였다. 두 아이 모두 아직은 시력에 그 어떤 문제도 없다. 임신부터 꼬박 1년을 넘도록 이어온 모유 수유 기간까지 절제의 끝판왕을 감당한 아내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너희들이 아빠 아들이어서가 아니라, 아빠가 너희들의 아빠라서 정말 고맙고 행복해”
아이들에게 종종 전하는 말이다. 청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흔히 좋은 아내를 바란다지만, 평생을 약속한 상대에게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주는 것이 맞다 생각했다. 그런 마음은 아이들에게 더 깊숙이 번졌다. 나와 닮은 내 가족, 내 식구와 함께하는 일상은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아빠로서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했다. 태담을 시작으로 퇴근 후 목욕, 기저귀, 양치, 빨래, 간식과 놀이 등에 심취했다. 워낙 체력이 약한 아내를 돕기 위한 취지도 있었지만, 매 순간 아빠로서 할 수 있는 일들에 최선을 다했다. 세현이는 꼬박 2년을 매일 손수 재웠다. 그날 회사에서 있었던 일부터 온갖 뒤죽박죽 동화 이야기, 그리고 동요와 유행가를 들려주었다. 꿈 이야기는 삼부자에게 필수 코스가 되었고, 자장가도 마찬가지였다.
3년이 지나 둘째가 태어났다. 형과는 성격도 취향도 많이 다른 둘째로 인해 상황은 미묘하게 조금씩 달라졌다. 아이와 나 단둘 일 땐 교감과 공유가 한 방향으로 흐르는 물줄기였는데, 둘째의 등장으로 인해 그 물줄기는 조금 더 복잡하고 여러 갈래로 뻗어나갔다. 이때부터 중요한 것은 바로 ‘균형’이었다.
유모차 바퀴가 닳도록 돌아다녔다. 장난감 도서관 대여 목록에 매주 이름을 적어나갔다. 좋아하는 책과 장난감의 서열이 만들어졌다. 같은 책을 여러 번 쉬지 않고 읽어 주면서도 지치지 않았다. 멍청한 좀비부터 다정다감한 초식공룡, 인형극도 이어졌다. 가장 중요시하는 육아의 태도로 경청하고 반응하는 것은 신념으로 이어오고 있다. 짧은 대화, 아이의 상상, 지나치기 쉬운 표현, 매 순간 달라지는 아이의 표정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교감과 공감의 기운이 내 안을 채워나갔다. 좁은 집이었지만 숨바꼭질부터 얼음 땡, 무궁화꽃까지 쉬지 않았다. 이때 가장 중요한 핵심은 내가 아이를 이기면 안 되는 것이다. 막무가내로 아이를 이기거나 형편없는 실력 차이로 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반드시 아슬아슬하게 져야만 한다. 아빠를 이겼을 때의 행동과 표정은 그 어떤 영양제보다 더 힘이 되어 주었다.
나란히 누워 잠들기 직전 일부러 코 고는 소리만 내도 웃어댔다. 아이가 둘이 되니 웃음소리도 더 커졌고, 웃음 유발 버튼도 쉽게 작동됐다. 아이들과 놀아주다가 이유 없이 하던 행동을 멈추고 마치 정지화면이라도 된 듯 10초 정도만 가만히 있어도 여러 상황이 이어졌다. 흔한 장난감 없어도 마냥 즐거웠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빠, 아까 태현이한테 일부러 져 준 거 나 봤어. 나 어릴 때도 그랬어?”
설마 했던 순간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져주는 게 이젠 세현이에겐 먹히지 않겠구나 하고 살짝 긴장했다. 다행히도 아빠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동생에게 티 내지 않겠다고 의젓하게 말해주었다. 어쩌면 태현이도 곧 눈치를 채겠지. 마음의 준비를 미리 한 날이었다.
운이 좋아 형제가 나란히 같은 어린이집을 다니게 되었다. 국공립이라 프로그램도 다채로웠고, 무엇보다 갓 지은 건물이라 모든 것들이 마음에 쏙 들었다. 이틀을 꼬박 머핀과 쿠키를 구워 벼룩시장에 참가했을 땐 모두 입이 귀에 걸려 몹시 신나 했다. 아빠랑 같이 만들었고, 이름이 들어간 스티커까지 붙였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운동회, 재롱잔치, 졸업식까지 모든 순간을 사진에 담았고 친구들에게까지 그 사진을 전했다. 아이들 부모님으로부터 전해 듣는 고마운 인사는 두 아이를 마주하고 보는 거울과도 같아 더 뿌듯했다.
꼬마인 줄로만 알았던 녀석들은 이제 어엿한 초등학생이 되었다. 세현이는 이제 혼자 씻고, 태현이도 여러 가지 면에서 혼자 해보겠다고 스스로 나서는 나이가 되었다. 점점 아빠의 역할이 줄어드는 것만 같지만, 또 한편으론 전혀 달라질 것 없었다.
학교에서 배운 것을 내게 전하는 눈빛은 예사롭지 않다. 학교에서 배운 하루도 안 된 신선한 지식으로 길지 않은 토론을 나누다 보면 뒤늦은 공부 의지가 활활 타오르기도 한다. 뜬금없는 질문이라도 그 결은 반짝반짝 빛난다. 코로나로 위축되는 시절도 있었지만, 그런데도 동네에 자리 잡은 여러 교육시설은 두 아이에겐 행운이었다. 책 읽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어린이 도서관은 어른이란 내 존재를 부정하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다. 온 식구가 매주 찾곤 하는데 아이들이 고르는 책에 그림의 비중이 점점 줄어든다. 창의 동굴 ‘이로움’은 코딩 전문 수업, VR 체험 등 학교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프로그램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중구진로직업체원지원센터’를 통해서는 다양한 직업과 취미 활동을 체험했다. 정동길에서는 역사 가이드를 체험했고, 세운상가와 인쇄 골목을 같이 누볐다. 2학년 둘째보단 5학년 첫째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고 있지만, 둘째에게는 더 많은 경험이 약속된 것 같아 벌써 흐뭇하다. 100점을 맞기 위한 공부가 아닌, 이해하고 사고하고 배려와 책임감이 쌓여가는 배움을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이어가고 있다.
“미안하구나. 난 네게 그러질 못했단다.”
그땐 다정다감한 아빠의 모습은 없던 시절이었다고, 아버지는 묵묵히 말씀하셨다. 세월이 흘러 두 손자와 막내아들이 허물없이 노는 모습을 보고는 고백하듯 뒤늦은 미안함을 그렇게 전하셨다. 과거, 아버지와 함께 보낸 시간은 손꼽힐 정도로 적었다.
그날 밤 여러 생각이 들었다. 나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력이 없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내 부모님의 마음은 과연 어땠을까. 생각은 길어졌다. ‘자식 낳아봐야 부모 맘 안다’라는 그 말이 며칠 동안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세상을 반만 볼 수밖에 없는 컨디션을 아쉬워하고 불편해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단 한 순간도 나를 낳아준 부모님을 원망하거나 미워한 적은 정말이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와 아내, 세현이와 태현이, 아빠가 된 오늘이 내겐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우리는 그렇게 태어났다. 오랜 걱정과 근심을 안고 다행스럽게도 건강하게 태어났다. 생명의 탄생, 그 신비를 우리는 이미 체험한 것이다.
품에 안아 재울 땐 정말이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았다. 그날 이후 가끔은 날 좀 눈에 넣어달라고 아버지께 애교도 부려본다. 그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이름, 바로 가족이다. 맛있는 음식이 아이들의 입속으로 들어간다. 너무 맛있어서 눈은 커지고, 입술은 오물거린다. 턱관절이 움직이는 그 부드러운 리듬은 잔잔하게 내 뺨을 어루만지는 바람 같다. 식탁에 둘러앉아 도서관 놀이를 할 땐 진지함도 묻어난다. 한 권이 두 권이 되고, 독서가 회의와 대화로 번지는 풍경은 너무 달콤해서 솜사탕을 크게 한입 먹은 것만 같다.
혼자 해보려다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 전전긍긍해 하는 모습은 애처롭지만 그대로 둔다. 지름길보단 더뎌도 나아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내 역할임을 잊지 않는다. 몇 번의 실패가 이어지면 쉽게 흥미를 잃고 포기하지만, 그것을 실패가 아닌 연습이라 말해주고 격려해 줄 때 비로소 숨 쉬고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엄마를 따돌리고 셋이 나란히 이발 하고 나올 땐 유독 햇살이 더 반짝거린다. 그리곤 손에 음료수 하나씩 쥐어야 성대한 의식이 마무리된다. 눈곱만큼 거짓말을 보태자면, 너무 행복해서 가끔은 괜히 불안해지곤 한다. 찰나의 행복이 이어져 영화처럼 펼쳐진다.
“아빠 직업은... 아빠야! 그러니까 오래오래 아빠 해야 해!”
저희끼리 한참을 쑥덕거리더니 곁으로 달려와선 이렇게 말하곤 도망간다. 아이들 덕분에 절대 놓쳐선 안 될 평생직업을 갖게 되었다.